[SBS뉴스]'따라쟁이' 앵무새, 각박한 우리네 모습이 보인다 관리자 2020-06-12 '따라쟁이' 앵무새, 각박한 우리네 모습이 보인다
<앵커> |
[한국미술응원프로젝트 시즌 5] 진영-앵무새와 현대인 관리자 2020-01-02 [비즈한국] 한국미술응원프로젝트의 목표는 진정한 의미의 중간 미술 시장 개척이다. 역량 있는 작가의 좋은 작품이 합리적인 가격으로 미술 시장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시즌 5를 시작하면서 이를 구현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식을 제시하려고 한다. 본 프로젝트 출신으로 구성된 작가위원회에서 작가를 추천하여 작가 발굴의 객관성을 위한 장치를 마련하고, 오픈 스튜디오 전시, 오픈 마켓 등 전시 방식을 획기적으로 제시해 새로운 미술 유통 구조를 개척하고자 한다.
in the middle of the night 02: 193.9x130.3cm Acrylic on Korean paper 2019
자연은 아직까지도 풀어내지 못하는 많은 숙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물음을 풀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지만, 미궁 속에 있는 자연의 신비한 현상은 여전하다.
거기에 깃드는 것이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정신을 풍요롭게 했고, 예술을 기름지게 만들었다. 이를 자양분 삼아 피어난 대표적인 예술이 상징주의다.
과학으로 풀지 못하는 자연 현상을 그냥 넘기기에는 미심쩍었던 예술가들이 찾아낸 돌파구였던 셈이다. 배후에 불가사의한 힘 혹은 존재가 있다고 믿고 이를 표현했다. 그런 생각을 신화나 현실의 사물에 빗대어 풀어내는 방법으로.
따라서 상징주의는 표현된 결과물로 접근하면 풀어내기가 수월치 않다. 상징의 코드를 알아야 해석이 가능한 예술이다.
big sweet pumpkin 01: 80x80cm Acrylic on Korean paper 2016
19세기 말 이처럼 심각한 얼굴로 등장한 상징주의는 사람들의 호감을 얻지는 못했다. 진지한 만큼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술의 영토를 무한히 넓히는 데 한몫을 단단히 해낸 예술이다.
그런데 이런 상징 코드는 20세기 후반 본격적으로 등장한 새로운 구상 회화에서 진가를 보여준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시대 감성에 맞는 적절한 상징을 내세워 대중적 호응을 얻고 있다. 그렇게 해서 성공한 예술이 팝아트다.
팝아트에는 이 시대 대중적 이미지가 많이 등장한다. 가벼운 것 같지만 그것이 상징 뒤에 감추고 전달하려고 하는 내용은 결코 만만한 게 아니다. 그 중 캐릭터를 내세운 상징의 방법은 대중과의 소통에 더욱 효과적이다.
캐릭터 자체를 장식적으로 보여주는 회화도 있다. 그런 작품들도 하려는 이야기는 분명히 있다. 캐릭터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두드러져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런데 캐릭터를 내세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려는 작가들 대부분은 진지한 얘기를 가지고 있다. 진영도 이런 태도로 작품을 만드는 작가다. 그의 작품에도 자신이 개발한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의 눈길을 쉽게 유도한다.
treasure hunters: 72.2x60.6cm Acrylic on canvas 2019
그의 캐릭터는 앵무새다. 그림 속에는 앵무새 머리를 한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그들은 아주 조그맣게 그려졌는데 모두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 산책하고, 담소를 나눈다. 피크닉이나 스포츠를 즐기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무슨 종교적 의식 같은 모임의 분위기도 있고, 탐사하듯 숲 속을 헤매기도 한다. 모두가 우리 일상의 모습이다.
그러면 그의 앵무새 캐릭터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을 통해서 현대인의 반복과 모방 심리 표현하고 싶었다. 우리는 의식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역할과 모양새를 취하며 산다. 마치 무대에 선 연극배우처럼.”
전준엽 화가·비즈한국 아트에디터 writer@bizhankook.com |
4+1인칭시점 : 정부청사갤러리 기획전 관리자 2019-09-24 https://www.neolook.com/archives/20190803e 4+1인칭시점김민주_김태연_이다솜_진영展기획 / 나형민 인간은 항상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단순히 자기 내면만의 자각을 통해서 고민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자아에게 주어진 공간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자아는 온전한 독립된 개체로서의 1인칭이 될 수도 있지만, 외부의 영향 아래에서 나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내가 아닌 타자와 같이 3인칭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공간(空間)이란 '아무것도 채워져 있지 않은 빈 곳'이라는 의미이지만, 우리 주변의 공간은 개개인의 흔적, 추억, 애증으로 켜켜이 메워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빈 곳에 자아의 주체성으로 채워져 가고 있다기보다 주어진 공간에 자신의 모습을 짜 맞추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현대문명의 진화가 우리에게 매우 수월한 공간의 편의성과 접근성을 부여했지만, 언제인지 모르게 모두 동일한 핸드폰을 쓰고, 같은 커피를 마시고, 비슷한 기사를 보며, 유사한 패션으로 공간을 배회하게 한다. 예전에는 각 지역마다 독특한 색깔이 있었고 고유한 문화가 있었는데, 오늘날 개개의 공간들은 공동화(共同化)되고 있는 듯하다. 공간 속에서 인칭이란 '어떤 행동이나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가'의 문제이다. 소위 1인칭이란 그 행위의 주체가 '나'임을 스스로 지칭하는 말이지만, 오늘날 자아는 1인칭이기보다 마치 앵무새와 같이 누군가의 행동을 따라 하고 복제하는 모습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진영 작가는 제기하고 있다. 진영 작가는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을 통해서 현대인들의 반복과 모방심리를 표현한다. 따라서 앵무새 탈은 시시각각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남들이 하는 그대로 따라 하고 행동하는 현대인을 상징한다. 그래서 세태비판적이지만 역설적이게도 표현된 앵무새의 탈을 쓴 인간들은 매우 유희(遊戲)스럽다. 공원에서 달빛을 즐기며 누워있거나 험난한 세파와 같은 파도 중에서도 튜브를 타고 즐기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덧 스스로 1인칭임을 망각하게 만드는 외적 자극에 무던해진 현대인의 초상을 연상시킨다. 마치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멋진 신세계』와 같이 조작된 유토피아에 이미 적응해 버린 타자화된 자아의 모습은 즐거운 듯하면서도 매우 세기말적이다.
김태연 작가는 이러한 현대문명과 자아와의 이질감 또는 초과학문명 속의 인간성 상실 등을 신체를 통해 표현한다. 한지(韓紙)에 한의학의 인체도와 같이 혈의 자리를 잡아가듯이 연결된 점과 선들은 디지털 문명의 관계를 '연결 혈자리'라는 정체성으로 드러내고 있다. 동양의학에서는 기(氣)의 원활한 흐름이 건강한 신체를 상징하듯이 오늘날에는 SNS와 같은 온라인 속에서의 활발한 관계성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켜 준다. 가상공간 속에 과잉 생산된 자아의 모습에 만족하고 기쁨을 느끼지만, 결국은 포샵된 얼굴이 실제의 얼굴이 아니듯이 신체라는 몸을 담고 있는 현실세계와 가상세계 간의 간격을 자각하게 된다. 그래서 김태연 작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헐벗었고, 마치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해부하듯이 관계성을 위해 껍데기를 들추어내고 있다. 그러나 한지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쌓아 올린 채색법과 수묵의 필치는 적나라한 해부도를 관찰하는 듯한 징그러움보다 상당히 은유적이며 정화된 방식으로 오늘날의 세태를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그림 자체가 매우 아날로그적이면서도 디지털적인 주제를 다루는 이질적인 분위기를 잘 형성하고 있다.
자아의 의식이든 신체이든 이를 한정하고 제약하는 공간은 인간에게 매우 디스토피아적이다. 현대의 도시란 산업화·문명화를 통해 이룩한 유토피아이면서도 빈부의 격차, 계층의 격차, 권력의 격차로 누군가에게는 디스토피아이다. 80, 90년대에는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내일에 대한 희망과 추억, 삶의 애환이 깃든 도시의 골목길은 노스탤지어의 공간이었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현실 공간이다. 전통적인 동양화에서는 그림자를 표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현상보다 항구적이고 영원한 대상을 추구한 동양예술정신으로 볼 때 그림자는 너무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1인칭인 자아들이 불변의 항구적 가치보다 가변적인 가치를 추구하게 된 것은 '불안' 때문이다. 도시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가변성과 같이 진로에 대한, 인생에 대한 불안은 예측불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가변적인 도시는 오늘날 대다수의 1인칭이 직면한 현실이며 거주지이다. 더욱이 도시에 거주하는 예술가에게 도시 공간은 중요한 작업 소재이다. 이다솜 작가는 인적이 없는 도시 공간 속에 순간적으로 반영되고 사라지는 그림자를 표현한다. 이내 사라질 환영임에도 불구하고 고정태로서의 흔적을 화폭에 남김으로써 공간의 실재성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그래서 그 공간은 내가 거주하고 있는 낯익은 공간으로서의 정감이 서려 있기도 하고 낯선 타지와 같이 텅 빈 공간으로서 쓸쓸함을 자아내기도 한다.
대다수의 현대인은 도시에 기거하면서도 항상 지평 너머 새로운 세계를 갈망한다. 여기(here)가 아니 저기(there)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이상향을 꿈꾸면서 유희하고자 하는 소망은 김민주 작가의 작품 속에 잘 반영되어 있다. 김민주 작가의 작품 「휴가」에 등장하는 건물은 매우 낯익은 전형적인 도시 속 집의 모양새이다. 그러나 그 집의 내부에는 산수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리고 그림 한 켠에 정박하여 있는 조그마한 나룻배는 우리를 태우고 계곡을 거슬러 올라 도원(桃源)으로 안내해 줄 것 같이 대기하고 있다. 이러한 휴가 또는 이상향에 대한 욕망은 도시의 현실을 뚫고 나올 듯이 건물의 한쪽 구멍을 통해 흘러넘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현실이라는 공간 속에서의 일탈과 자유라는 흐뭇한 상상을 도출하고 있다.
각각의 작가들이 담아내고 있는 화폭이라는 공간 속에 투영된 다 인칭의 모습은 시대 인식과 다르게 다행스럽게도 우울하지 않다. 한편으로는 세기말적이고 세태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머러스하다. 그것은 아마 예술가만이 가진 고유한 혜택 때문일 것이다. 작가들은 누구도 갖지 못한 자기만의 유일한 공간(화폭)을 소유한 주인이다. 그래서 김민주 작가의 작품 속에 나오는 연못 속에 자유롭게 유영하는 반인반어(半人半魚)와 같이 자기만의 공간 속에서 와유(臥遊)한다. 당(唐) 대의 이백(李白)은 '산중에서 물음에 답하다.'라는「산중문답(山中問答)」이라는 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 어찌 산중(碧山)에 사는가 묻는다면 (問余何事栖碧山) / 웃으며 대답하지 않으니 스스로 마음이 한가롭다. (笑而不答心自閑) / 흐르는 물에 복사꽃이 떨어져 아득히 흘러가노니 (桃花流水杳然去) / 별천지(別天地)이지 인간 세상은 아니라네. (別有天地非人間) ● 각박한 공간 속에 살아도 자기만의 공간을 가지고 있는 예술가들에게 이토록 다른 세상을 그리워하면서도 왜 여기에 살고 있고 여기를 표현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빙그레 웃음 지을 것이다. 그것은 자아를 상실한 체, 3인칭으로서의 삶이 공간 속에 적응해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 공간은 만만치 않지만 자기만의 별천지를 각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상자들도 작가들 각자의 별천지에서 같이 유희할 수 있는 또 다른 1인칭이 될 수 있어 예술은 즐겁다. ■ 나형민 |
앵무새가 앵무새가 아닐 때_진영: happy island 관리자 2019-09-03 앵무새가 앵무새가 아닐 때_진영: happy island 대안공간 눈 새싹이음 프로젝트_조재현 1 그리고 이 일은 작업을 여전히 보기보다 ‘읽기’의 대상으로, 그래서 여전히 한시적인 표정만을 제시하는 이모티콘보다 징후와 징조로서의 ‘텍스트’로 가능하게 만든다. 그때의 불변항이 피사체와 그 배경을 담은 프레임을 넘어서는 ‘외부’가 있다는 암시다. 즉, 프레임은 자폐된 표면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존재에게 세계의 나머지를 충동시킨다는 것. 그로부터 읽는 것을 수 행하는 존재는 결국 알게 된다. 그 외부에 위치한 것 중의 하나가 스스로였다는 것을. 이제 존재는 작가의 말보다 스스로의 내 면을 움직이면서 그 작업을 자신이 그렇게 허락했다는 필연성에 대해서 스스로를 추궁해야 한다. 누구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습작 혹은 창고에 잠겨진 그림과 관객이 애타게 읽은 그림에는 어딘가 남은 ‘때’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작업이 범람할 때, 마땅히 그 번짐을 허용하고자 그 가장자리를 서성이는 존재는 아마도 이윽고 작업으로 스며들 었을 것이다. 그다음엔 작업과 존재의 양쪽에 때 같은 영구적인 잔상이 남겨질지도 모른다. 이렇게 ‘모른다’라고 적어놨다가 전 시를 보고 나서는, 역시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작가 진영의 《happy island》에는 그런 스미고 번진 후의 잔상들이 영원히 남 아있다. 서있던 곳은 섬의 가장자리였을까 혹은 바다의 언저리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려다본 것이었을까. 행복한 섬을 지 켜볼 수밖에 없었을 때 조금은 다분한 의미에서 침체되었다. 세 개의 장소가 있다. 먼저 하나는 공원(<happy island> 연작)이고, 두 번째 것은 숲(<treasure hunters> 연작)이다. 어둠이 내리기 전까지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은 공원에 있고, 빛이 들기 전까진 숲에 있는다. 공원은 휴식의 쓰임새를 가졌고 향유할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한 공간이다. 그러나 숲은 다르다. 숲을 다니기 위해서는 빛을 밝힐 수 있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은 무언가 를 욕망하고 발견하기 위해서 움직인다. 이것은 달리 얘기하면 향유하는 동안에는 무엇을 찾지도 욕망할 수도 없으며, 그리고 무엇인가 찾고 욕망하는 동안에는 향유하거나 휴식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두 공간 위로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들은 대개 그들이 앵무새라는 것을 증명하도록 같은 행동과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세 번째 공간(<natural space>)에서는 다르다. 그곳에서 형상들은 제각기 행동한다. 《happy island》를 ‘읽는’ 것으로 만드는 문제성은 여기서 시작한다. 2 은 때때로 ‘사회화’라고 명명되는 모방이란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심지어 두 가지 다 확신이 없을 때에도, 인간은 주위의 다른 이를 모방한다- 그러니 앵무새가 모방을 하는 것처럼 인간은 아무렴 앵무새 머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시나리오가 한 주체의 행동의 기준과 규범이길 넘어서서, 인식에서 마저 그러한 기능을 수행할 때 발생한다. 어 떤 시나리오는 한 인간이 점원으로서, 안내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지만, 동시에 그것은 지나치게 인간을 역할로 고 정시킨다. 점원은 점원의 역할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움직이는 커피 자판기이며, 안내원 역시 안내를 하는 ‘인간’이기보다 고 작, 숨을 쉬는 네비게이션으로서 드러난다. 인간은 타인의 역할 말고는 그 어느 것도 인식하지 않는다. 그가 아침은 먹고 일하 는지, 건강한지, 그리고 그가 착취당하거나 인간다운 대우를 받고 있는지에 그 어느 것도 물음하지 않는다. 그리고 물음하지 않 을 때, 타인은 역할에 고정되고 응고된다. 그로써 그는 인간이 아니게 된다. 마르크스의 오래된, 그렇지만 정확한 용어를 사용 한다면 그것은 물화(物化, Verdinglichung)다. 사물이된 인간. 아마도 갑질, 도구화, 착취, 폭력과 같은 자본주의의 불명예들은 이런 배경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때 사물이 인간의 지위를 되찾는 방법은 역할의 여집합을 드러내는 것이다. 어떤 지역에 살고 있다는 것, 혹은 대학생이라는 것, 어떤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것 등. 자본주의의 불명예로 지적된 일들이 고발되어질 때, 고발자 혹은 비판자는 역할 이외의 것들로, 시나리오 안에서 발생한 일이지만 시나리오 밖의 언어에 의지해 사물을 설명하려 한다. 그 순간에 이제껏 그의 ‘역할’ 만을 드러냈던 사물은 비로소 역할을 제외한 나머지를 드러내면서 사물이기를 멈춘다. 이때 사물이 -사실은 남몰래-고이 간직 하고 있었던 역할을 제외한 나머지 전체란 ‘생활(leben)’이다. 그것은 한 존재의 일상적 삶의 세계를 드러내는 사소하지만 단단 한 다른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사물이 ‘생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물화는 그 효력이 유예된다. 다시 작업으로 돌아가자. 공원과 숲에서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은 이와 같은 물화가 예정되어 있다. 이 고정에는 ‘인물적 역할’ 과 ‘공간적 역할’이 함께 부려진다. 앵무새의 특징이 모방인 것은 맞지만, 오직 모방만이 특징인 것은 아니다. 그는 일부일처제 를 따르고, 사회적인데다가 대개 초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때때로 육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외의 것들에도 불구하고 앵무 새의 역할은 모방이기에, 모방을 제외한 특징은 소거되고 ‘모방’의 역할로만 고정되어 인식된다. 여기서 먼저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에 대한 인물적 역할로의 고정이 발생한다. 그리고 공원과 숲에서도 역시 공간적 역할로의 고정이 발생한다. 공원과 숲은 그자체로 다양한 행위가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이지만 각각 향유·휴식 그리고 찾기·욕망만을 허용하고, 또 서로를 배제한 다. 이제 남은 것은 향유·휴식과 찾기·욕망만을 각각 반복하고 모방하는 사물인 것만 같다. 이렇게 두 층위의 고정으로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에 물화는 예정된다. 단, 세 번째 공간이 발견되기 전까지. <natural space> 는 두 공간 사이에 ‘생활’의 여지를 제공함으로써 예정된 물화를 유예시킨다. <natural space>의 형상들은 제각기 다른 시선 을 쥐고 있으며, 각별한 행위를 하고 있다. 그들은 모방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며, 그 공간에 특별한 시나리오가 부여 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모방으로만 형용 가능 했던 그들이, 이 장면에서는 -모방을 제외한-시나리오 밖의 언어에 의지해 설명된다. 그 때 확인되는 것은 ‘모방’하지 않는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의 ‘존재’이거나, 그가 ‘모방’을 하지 않고 다른 것을 가 지거나 행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사물’이었던 객체가 생활 그러니까 ‘삶’을 가진 주체로 그 지위가 복원될 때, 같이 되살아나는 것은 ‘세계’란 낱말일 것 이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허락한 시선 외부. 그리고 그들을 객체로 대우했던 -관찰자-스스로에 대한 발견. 그런 후에야 존재는 물음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물을 수 있다. 그들은 왜 모방을 하는가. 왜 두 공간에서 앵무는 어째서 ‘모방하는 앵무’로만 드러나야 하는가. 모방하지 않는 동안 그들은 무엇을 하며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서 작업은 구획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질문은 지시한다. 전시장의 작업물들은 이 세계의 일부일 뿐이며, 세 계의 외부는 존재한다. 캔버스 위로 등장하지 않은 외부의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을 발견하기 위하여 또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의 외부를 향하여 존재는 이제 작업을 읽어야 한다. 3 오 밖에서 스스로를 관찰할 여력을 갖기란 좀처럼 불가능하다.-특히 타인에 관하여는 더더욱- 그러나 작업이 범람할 때, 존재 는 사실 스스로가 위치한 곳이 작업 ‘내부’일지도 모른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그리고 투영하고 동일시하게 되는 것은 공원과 숲에서의 형상일지도 모르겠으나, 발견하게 되는 것은 <natural space>로 표현되는 세계 ‘외부’이다.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서 만, 한정된 행위에 대한 모방을 허락하는 세계에도 외부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외부에 대한 증명이 이미 존재 앞에서 끝 났다는 것. 이제 존재는 처음으로 의심할 수 있다. 세계는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세계의 외부는 존재하고 그것이 이미 증명되었으므로 ‘다 른’ 세계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위로 존재 주변의 사물들이 생활하는 삶으로 복원되고, 존재는 주어진 세계에 부역하는 것을 중지시키고 세계를 다르게 읽는 주체의 지위에 오른다. 전시장을 나가는 주체는 이제 하나의 역할로 드러난 타인을 마주할 때, 역할 너머의 여지를 찾고자 주춤거릴 것이다. 그때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진실에 도달한다는 것은 늘 드러나지 않 는 것들로부터 가능하거나, 감추어진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드러난 것으로만 타인을 취급했을 때 그것은, 타인을 지금의 사회 와 같은 방식으로 응고시킬 것이라는 두려움. 그것이 존재에게 잔상처럼 남는다. 마침내, 전시는 감각을 바꿔내기를, 또 그래서 경험하는 것이 변화하기를 종용하는 것과 같다. 작가 진영의 개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의 ‘내용’보다는 ‘형식’쪽을 따져보는 게 옳을 것이다. 《happy island》는 귀엽고 흥미로 운 동화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가장자리에서 앞을 정확하게 비틀기에 빛난다. 숲, 공원,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까지 그들은 모두 상징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설득력을 갖춘 상징은 캔버스라는 가상을 숲과 공원에 도착한 존재에게 ‘실재’로 표상 하게끔 만든다. 하나의 역할만 허락받거나, 그에 함몰하도록 요청되고, 휴식의 세계와 노동의 세계가 서로를 배제하거나 철저 히 격리된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 그러나 전체적인 작품에서 가장 애매한 특징을 가진 <natural space>는 그 애매함 때문에 전체에서 가장 강한 예외를 만들고, 그 예외 때문에 전시에서 흐르는 일관된 서사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해석을 해내도록 요청 한다. 가상이 진실이 되었다가, 이윽고 그 진실 자체에 균열이 발생한다. 그 균열 사이로 작업은 범람하고 침범하고, 존재는 스 며들고 번진다. 앵무새가 앵무새가 아닐 때 《happy island》는 귀엽고 강하고, 풍부하다. 서두에서 누구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습작 혹은 창고에 잠겨진 그림과, 관객이 애타게 읽은 그림의 ‘때’가 다를까하고 물 었었다. 내가 본 것은 가상, 진실 그리고 그것의 균열을 오가며 주춤거리고 흔들린 다음 남았던 잔상들이었다. 그것들이 있다고 믿었다. 누군가, 누구나 전시를 본 후, 타인이라는 사물에 관한, ’진실’에 관한 가책을 앉고 나가야 했다. 그 위치가 섬의 가장자 리였든, 바다 언저리였든, 내려다 본 것이든 존재는 본 것에 관하여 책임을 져야한다. 그 가책에 대한 어쩔 줄 모름이 전시의 끝 의 유의미하게 침체를 남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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